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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흔적남기기&리뷰

창덕궁 제대로 돌아보기-#6 [돈화문 일원]

 

 

 

 

 

 

 

창덕궁을 소개하면서 관람순서대로 포스팅하다보니..

 

창덕궁 후원을 먼저 포스팅하게 되었고...

 

6편째가 되어서야 창덕궁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살펴보게 되었내요..

 

순서가 좀..ㅋㅋ

 

암튼 6번째 글만에 창덕궁에 대해 간단하게 나마 살펴보고..

 

돈화문 일원에 대해서도 알아볼까 합니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으로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했답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재건되내요.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내요.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내요.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답니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이 붙어 있어서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내요.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답니다.

 

또한 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내요.

 

 

풍수적으로 창덕궁 터가 좋은지... 경복궁 터가 좋은지 잘 모르겠지만..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을 두고 새로운 궁궐을 지은것은 아마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찜찜했지 않았을까 싶내요..ㅋㅋ

 

암튼 자연과 조화를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창덕궁...

 

이제 정문이 돈화문 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으며,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으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내요.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답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내요.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합니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창덕궁 밖에서 바라본 돈화문 풍경

 

 

 

창덕궁안에서 바라본 돈화문 풍경

 

 

창덕궁 안내판

 

 

 

창덕궁 문화해설사 출발장소 안내판

 

 

 

창덕궁 세계문화유산 표지석

 

 

돈화문 일원 안내판

 

 

돈화문을 지나 창덕궁에 들어서 열심히 달려 후원을 돌아보고...

 

다시 돌아나온곳이 금천교앞...

 

그래서 금천교에서 부터 다시 창덕궁을 돌아보기 시작하내요.

 

예로 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했는데,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하며,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가내요.

 

1411년(태종 11)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은 다리라 하여 '금천교'라 불렀고,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2012년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금천교와 진선문쪽 풍경

 

 

금천교에서 바라본 궐내각사쪽 풍경

 

 

 

금천교를 건너와 뒤돌아본 풍경

 

 

 

진선문 풍경

 

 

 

금천교를 지나 인정전 구역으로 들어서기전에 만나는 진선문...

 

진선문에는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엔느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르려라'라고 신문고를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내요.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려웠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겠죠.

 

 따라서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는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많아져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답니다.

 

 

진선문에 설치된 신문고... 상상이 잘 않되는군요.. 신문고가 설치되었다면 2층 누각이 있는 돈화문이 더 좋지 않았을까요..ㅋㅋ

 

신문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영조 재위 4년째인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돈화문 2층 돈화문루에서 헌괵례를 받았는데..

 

헌괵례는 싸움에 나간 장수가 적장의 머리를 왕 앞에 바치는 의식을 말하내요.

 

이때 영조는 서울에 사는 노인들을 돈화문 앞에 초청하여 난의 원인이 당쟁에 있음을 지적하고

 

여기에 가담한 백성들에겐 중죄를 주지 않을 것이라 하였답니다.

 

이처럼 돈화문 앞 광장은 대민광장이기도 했내요..^^

 

 

 

 돈화문 일원 배치도

 

 

창덕궁 전체 배치도

 

 

 

이렇게 돈화문과 금천교..진선문을 살펴보았고..

 

담편에는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일원을 살펴보겠습니다.